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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수의 지금 여기] 대일 외교, 현실을 직시하자
윤석열 정부 대일 정책의 요체는 ‘양보 외교’다. 한일 양국의 민감한 사안에 대해 일본이 요구하기 전에 알아서 배려해 주는 것이 핵심이다. 그렇다면 윤 정부 전반기 동안 어떤 결실을 거두었나. 이렇다 할 성과가 없었다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대부분의 정책이 국민 동의를 얻지 못한 채 논란과 갈등을 불렀다. 27일이면 일본의 새 총리를 뽑는 집권 자민당 총재 선거가 실시된다. 이와 맞물려 우리 정부의 대외 정책도 후반기에 접어든다. 대일 외교의 손익을 따져보고 이후의 길을 다시 점검해야 할 시점이다.
윤석열 대통령과 일본 기시다 후미오 총리는 지난 2년 4개월 동안 정상회담을 열두 차례나 개최했다. 한일 관계 개선이라는 명분 아래 우리가 일방적으로 양보해서 얻은 결과다. 그러나 정부가 성과로 내세우는 ‘긴밀한’ 한일 관계의 실체가 무엇이었는지는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문제. 2023년 3월 6일 윤 대통령은 일본 전범 기업을 대신해 한국 기업의 돈으로 만든 기금으로 배상금을 대납하는 ‘제3자 변제안’을 발표했다. 일본의 요구가 없는데도 대통령이 자발적으로 내놓은 조처였다. 그러면서 대통령은 향후 한국이 구상권을 청구하지 않도록 하겠다며 일본 기업의 우려까지 덜어주는 배려를 실천했다.
그리고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출 문제. 주변국이 모두 반발했으나 우리 정부는 침묵했다. 아니 오염수 방출 전부터 일본을 감싸는 행보를 다방면에서 이어갔다. 대통령이 일본 정치인을 만나 수산물 수입 재개 요청을 받고 ‘한국 국민의 이해를 구해 나가겠다’고 언급한 내용이 일본 언론 보도로 공개됐고, 여당인 국민의힘 역시 자비를 들여 오염수 안전성을 홍보하는 데 여념이 없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가장 최근의 양보 외교 사례는 일본 사도광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찬성이다. 일본은 사도광산 전체 역사를 반영한 전시물을 변방의 향토박물관으로 돌리고 ‘강제’라는 표현을 모호하게 처리했다. 그런데 한일 정부가 ‘강제노동’이란 표현을 사용하지 않기로 사전 합의했다는 일본 언론 보도가 나와 충격을 안겼다. 일본은 축제를 벌였고 우리는 국론분열에 빠졌다.
우리가 먼저 손을 내밀면 일본도 화답할 것이다. 윤 정부의 대일 정책 기조는 늘 이런 식이었다. 하지만 우리 쪽의 일방적인 퍼주기에도 일본 정부의 성의 있는 호응이나 실질적 상응 조처는 없었다. 조선인 수천 명이 숨진 우키시마호 침몰 사고만 해도 그렇다. 일본 정부가 그렇게 발뺌하던 조선인 명부의 일부가 얼마 전 공개됐는데 그동안의 거짓말에 대해 사과 한마디가 없다. 다른 사안은 말해 무엇 할까.
일본에 대한 우리 정부의 절박한 기대가 사실상 ‘물거품’으로 끝났듯 앞으로의 바람 역시 허망한 결과로 이어질 게 뻔하다. 일본 정부는 최근 들어 위안부 문제를 교과서에서 지우고 독도 영유권 주장을 강화하며 오히려 우경화의 길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양보 외교가 이런 결과를 낳았다면 이제 재고해야 할 때가 됐다.
대통령실의 한 핵심 인사는 ‘중요한 것은 일본의 마음’이라는 말로 누구를 위한 해명인지 모를 해명을 한 바 있다. 외교안보 책임자의 표현이라기엔 참으로 기이한 측면이 있다. 상대의 마음을 얻으려면 배려나 양보가 중요한 요소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하지만 이는 인간 개인의 도덕적 자질이나 종교적 수행에 어울리는 덕목일 뿐, 철저히 실리에 따라 움직이는 냉혹한 국제관계에 적용될 수 있는 원칙이 절대 아니다. 특히 과거사가 얽힌 문제에서 가해국이 아닌 피해국이 먼저 머리를 숙이는 게 가당키나 한가. 또 다른 굴욕일 따름이다.
차기 일본 총리를 결정짓는 자민당 총재 선거가 코앞이다. 향후 한일 관계의 새로운 방향을 가늠한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대한 시기다. 선거는 3파전 양상인데, 세 후보의 면면이 녹록지 않다. 세 사람 모두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고 자위대의 헌법 명기에도 적극적이다. 매년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이도 있다. 한일 관계 개선에 특별한 관심을 가진 후보가 없다는 뜻인데, 누가 총리가 되든 향후 한일 관계는 험난한 길이 될 게 분명하다.
이제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일본의 처분만 기다리는 외교로는 더 이상 얻을 것은 없다. 무엇보다 국민 지지를 받지 못하는 정책은 지속되지 못하는 법이다. 국내 정책도 그렇지만 외교 정책도 마찬가지다. 내년이면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이다. 윤 정부가 이제부터라도 대일 정책 기조를 전면 전환해야 한다. 다양한 분야에서 치밀하고 섬세한 대일 정책 논리를 개발하지 않으면 결코 일본으로부터 실효적 결과물을 끌어낼 수 없다.
2024-09-24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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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수의 지금 여기] 아름다운 사람
‘내 이름을 딴 추모 공연이나 행사, 사업을 원치 않는다.’ 지난달 21일 별세한 김민기 학전 대표는 생의 마지막 순간에도 스스로를 낮추었다. 저 유언은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묵묵히 일해 온 일생의 지론과 온전히 겹친다. ‘(자신의) 발자취가 있다면 그저 시대의 기록 정도이길 바란다’는 뜻도 남겼다. 포용과 달관, 무욕의 수행자를 닮은 삶. 영혼의 깊은 화인 자국을 우리에게 남긴 채 그는 70여 년 인생을 마감했다.
그것을 가로지르는 열쇳말 두 개를 꼽는다면 ‘음악’과 ‘사람’일 것이다. 전자는 타의에 의해 ‘음지’의 삶을 살았던 생의 전반부와 관련되고, 후자는 학전 대표로 ‘뒷것’(뒤에서 남 돕는 일을 조용히 수행하는 사람)의 삶에 매진한 인생 후반부와 연관된다. 금지곡 가수로 낙인찍힌 음지에서의 삶은 의도한 것이 아니다. 불행한 시대가 그렇게 만들었다. ‘저항 가수의 비조’라는 칭호가 있었으나 그의 목소리는 격노나 적의와는 거리가 멀다. 노래 속에 세상을 바꾸려는 거대한 계획, 가열 찬 포부가 있었던가? 그렇지 않다. 낮은 땅 후미진 구석에서 숨죽이며 힘겹게 살아가는 이들을 쓰다듬었을 뿐이다. 아니, 그 자신이 박해받고 고통받는 밑바닥 존재였다.
‘아침이슬’을 비롯한 포크 음악의 성취는 짧은 지면에서 거론할 주제가 못 된다. 그렇다 하더라도 부득이 한 가지를 들라면 ‘노랫말과 선율의 빈틈없는 직조’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가 직접 쓴 노랫말은 삶의 경험을 시적인 경지로 승화시켜 언어와 현실을 적실하게 엮는다. 여기에 아름답고 서정적인 멜로디가 완벽하게 조응한다. 낮게 읊조리는데도 청자의 가슴을 크게 울리는 이유다. 이게 김민기 음악의 탁월성이다.
1970년대까지도 국내 가요는 일본식 문화의 여파인 트로트와 미8군 출신의 스탠더드 팝이 주류였다. 이제 막 유입된 통기타 음악도 외국곡을 번안하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김민기의 포크 음악은 서구의 음악 문법에서 벗어나 한국 대중음악의 ‘자아’를 일깨웠다는 데 의미가 있다. 직접 만들고 부르는 예술로서의 가요가 스스로의 정체성을 모색한 거의 최초의 사례라 할 만하다.
이제 ‘사람’ 이야기로 넘어갈 차례다. 정권의 박해 속에 지하를 전전할 때도, 먹고 살기 위해 공장과 탄광에서 일할 때도, 머슴살이로 소작농으로 농사일을 할 때도, 그의 곁에는 늘 ‘사람’이 있었다. 그는 말수가 적고 수줍음이 많았으나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 기지촌 여성, 광부, 아이들과 부대끼고 어울렸다. 그 역시 투사나 영웅이 아니라 세상 속의 보통 사람이었단 뜻이다. 이는 곧 음악의 원천이기도 했다. 열일곱 나이에 죽은 친구의 부모에게 소식을 알리려고 기차 속에서 만든 ‘친구’, 군 복무 중에 정년퇴직 앞둔 선임하사의 푸념을 듣고 즉석에서 지은 ‘늙은 군인의 노래’, 결혼식도 제대로 올리지 못하는 공장 노동자들을 위해 합동결혼식 축가로 만든 ‘상록수’ 등등이 그렇다.
시대가 바뀌고 곡절 끝에 양지로 나온 그는 극단 학전을 세운다. 가수·작곡가에서 뮤지컬 연출가·소극장 경영인으로의 변신이었다. 수많은 공연과 무대를 기획하고 가수·배우들을 길러내는 데 탁월한 안목을 지닌 그였으나 단 한 번도 자신을 내세운 적은 없다. 오로지 후배들의 앞길을 틔우는 데 혼신을 다했으니, 이는 사람에 대한 굳은 믿음으로 가능한 것이었다.
지난달 22~24일 마지막 길을 가는 고인의 빈소에 많은 조문객들의 발길이 이어졌다고 한다. 영정 속 그 천진한 미소 앞에서 그들이 품었을 마음가짐은 무엇이려나. 감히 ‘존경’이 아니었을까 짐작해 본다. ‘사랑’과 함께 인간 의식 수준의 높은 자리에 위치한 것이 존경이다. 존경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를 터인데, 가장 중요한 척도는 내면의 깊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내면의 깊이란 무엇인가. 나 아닌 다른 사람, 곧 타인에 대한 공감 나아가 아픔을 이해하려는 노력,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본다.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깊이 있는 사람인지는 어떻게 판단하나. 결국 땅에 발붙여 살아온 삶의 모습에 답이 있는 것이다. 고통에 빠진 사람의 아픔을 함께하고 그 고통을 덜기 위해 자신의 안락을 포기하는 이라면, 존경의 칭호에 값할 만하다. 김민기가 그런 사람이다. 그는 이념의 틀이나 진영을 나누는 논리로 가둘 수 없는 큰 사람이다.
1971년에 만든 ‘아름다운 사람’이 귓가를 맴돈다. 슬픔을 이겨내는 사람의 아름다움을 어루만지는 노래다. 가장 사람다울 때 가장 아름다운 법. 고인의 전 생애가 그랬다. 사람으로서 사람을 사랑했던 ‘아름다운 그이’. 이제 시대의 가인(歌人)에서 영원한 가인(佳人)으로 남았다.
2024-08-06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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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수의 지금 여기] 멈춰 선 1년
오는 19일은 채 상병 1주기다. 채 상병은 지난해 7월 수해 현장 실종자 수색에 안전 장비 없이 동원됐다가 급류에 휩쓸렸다. 안타까운 죽음 이후 1년이라는 세월은 정지된 시간이었다. 채 상병 어머니는 1주기를 앞두고 간곡한 마음을 담은 탄원서를 경찰에 보냈다. ‘아들이 희생된 원인과 진실이 꼭 밝혀져 이후에는 아들만 추모하면서 여생을 보내고 싶다.’ 안일하게 대처한 군 지휘관이 합당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뜻도 덧붙였다.
그런데 이보다 먼저 탄원서를 제출한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바로 채 상병 순직 사건의 핵심 피의자로 꼽혔던 임성근 전 해병대 1사단장이다. 요지는 이렇다. ‘채 상병 순직 사건은 안타까운 사건이다. 하지만 군의 특수성을 고려해 그 사건으로 지휘관들을 처벌하는 건 문제가 있다.’ 언급한 ‘군의 특수성’에 대해서는 이런 설명이 뒤따랐다. ‘군인은 국가가 필요할 때 군말 없이 죽어주도록 훈련되는 존재들입니다.’
경찰은 결국 임 전 사단장의 주장 대부분을 수용하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8일 경북경찰청이 발표한 최종 수사 결과는 피의자 9명 중 임 전 사단장과 하급 간부 2명은 검찰 송치 대상에서 제외한다는 것. 임 전 사단장에 대해 무혐의 결론을 내린 것이다. ‘월권’은 맞지만 ‘직권남용’은 아니라는 논리였고, ‘업무상 과실치사’ 책임은 현장 지휘관들에게만 돌아갔다. 이를 납득할 만한 국민들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다. “1년을 끌어온 경찰 수사가 끝내 면죄부로 마무리됐다”는 비판이 쏟아지는 이유다.
이제 모든 이목은 ‘채상병특검법’으로 향한다. 특검의 취지는 채 상병 순직 수사 과정에서 대통령실과 국방부 등이 진상 규명을 방해했다는 의혹을 밝히는 데 있다. 이 특검법은 21대 국회 막바지인 지난 5월 국회를 통과했으나 윤석열 대통령의 재의요구권(거부권) 행사와 국회 재투표를 거쳐 폐기된 바 있다. 22대 국회가 열리자 다시 상정된 특검법은 지난 4일 표결 끝에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고, 예상대로 윤 대통령은 9일 또다시 거부권을 행사했다. 특검법이 국회에서 재의결되려면 출석의원 3분의 2(200명) 이상 동의가 필요한데 가능성은 높지 않은 편이다.
그렇다고 타협과 협상의 기대마저 버릴 순 없다. 열쇠는 윤 대통령이 쥐고 있다. 총선은 물론 각종 여론조사에서 드러난 민심은 분명하다. 지난해부터 최근까지 특검 찬성 응답률이 꾸준히 60~70%를 유지하고 있고, ‘수사 과정에 외압이 있었다고 생각한다’는 국민도 57%에 달한다. 지난달 20일부터 시작한 대통령 탄핵 국민청원은 이미 동의자 130만 명(8일 기준)을 넘어선 상황이다. 대통령이 특검에 ‘적반하장’ 식 태도로 일관한다면 국민들의 분노는 더욱 커질 것이다.
채 상병 특검의 취지는 단순하지만 그것이 상징하는 바는 간단하지 않다. 순직 사건의 진상 규명을 넘어 국가 운영 시스템에 사적 이익의 추구와 욕망이 개입된 위태로운 사태를 밝히는 일과 관련돼 있다는 뜻이다. 최근에는 임 전 사단장 지키기의 배후에 김건희 여사가 있다는 의혹까지 제기된 마당이다. 이번 경찰 수사 결과 역시 수사 외압 의혹 자체를 사전에 무력화하려는 의도의 산물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자본주의 사회는 자유로운 이익의 추구를 보장하는 체제다. 그러나 그 사적 이익이 정당한 명분을 지니려면 모두에게 공평한 여건이 바탕에 깔려 있어야 한다. 그 역할을 맡은 것이 국가다. 개인의 욕망이 빚는 갈등이 만인 대 만인의 투쟁에 빠지지 않도록 구성원의 욕망을 통제하고 타협의 지점을 찾는 일. 공공성 실현의 도구가 국가인 것이다. 그 맨 꼭대기 자리에 통치권자가 있다. 따라서 그는 앞장서서 공적 가치를 실현해야 하는 의무를 지닌다.
일찍이 사마천은 〈사기〉 ‘화식열전’에서 이를 꿰뚫고 있다. 정치의 본질은 사람들의 욕망을 인정하고 그에 맞는 정책을 펼침으로써 이익을 잘 얻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인데, 부(재산)를 놓고 백성들과 다투는 것이야말로 가장 나쁜 정치라는 것이다. 여기서 통치자의 바람직한 자세를 읽을 수 있다. 개인의 이익이 전체의 이익에 어긋나지 않도록 공평무사의 원칙을 지키는 일이 그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에 이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파다하다. 정치·경제·사회·문화·외교·국방 등 모든 분야가 뒷걸음질 치고 있다는 아우성, 공공 영역이 대거 축소되고 그 자리가 사적 이익의 장으로 변모해 가고 있다는 한탄이다. 대통령으로서 견지해야 할 공적 잣대가 부부, 가족, 지인 같은 사적 인연 앞에서 크게 흔들리고 있다는 방증은 아닌가. 채 상병 1주기, 국정 퇴행의 1년이 그렇게 묻고 있다.
2024-07-09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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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수의 지금 여기] 오물과 전단, 부끄러운 한반도
북한이 지난달 28일부터 대남 오물 풍선을 대거 살포했다. 최근 10여 일 간 전국에서 1000개 넘는 풍선이 발견됐는데, 개수와 규모 등에서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역대급이다. 정부는 즉각 대응에 나섰다. 4일 9·19 남북 군사합의의 효력을 전면 정지시키고 북한의 적대행위에 상응하는 군사행동 의지를 곧추세웠다. 이어 6일 탈북단체가 대북 전단 20만 장을 북한 지역에 살포했다. 9일에는 북한이 그토록 싫어하는 대북 확성기 방송도 재개됐다. 이에 북한도 대남 확성기 방송으로 맞불을 놓을 태세다.
불과 열흘 사이 몸집을 불린 이번 사태는 너무나 급작스럽다. 지금 남북 양쪽은 군사적 충돌까지 불사하겠다는 듯 격앙돼 있다. 군사합의 효력 정지로 최소한의 완충장치조차 사라졌으니 우려가 현실이 될 가능성이 없지 않다. 과거 남쪽에서 보낸 대북 전단에 북한이 고사포를 발사해 무력 충돌 직전까지 간 적도 있다.
이번 사태의 발단은 북한의 오물 풍선 살포다. 저급하고 치졸하며 비인도적인 행위임이 분명하다. 우리 국민들에게 큰 혼란과 피해를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용납하기 힘들다. 미사일 발사 같은 고강도 무력시위에 치중하던 북한이 어째서 저강도 도발에 나선 것일까.
일단 남쪽 정부와 국민의 관심을 환기하려는 저의가 있는 듯하다. 그동안 계속된 무력 도발은 생각만큼 큰 이슈로 떠오르지 못했다. 한편, 북한은 대북 전단을 문제 삼는다. 오물 풍선을 보낸 직접적 원인을 대북 전단으로 돌리고 있다. 속임수 같지는 않다. 북한 정권은 치를 떤다는 표현이 모자랄 정도로 대북 전단에 민감하다. 2020년 전단 살포를 이유로 남북 공동연락사무소까지 폭파한 바 있다.
제3자는 이번 남북 갈등 상황을 어떻게 볼까.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객관적 시각’이 중요하단 뜻이다. 우리는 북한의 풍선 살포 행위가 명백한 국제법 위반이며 국민 안전을 위협한다고 규탄한다. 풍선이 남쪽으로 넘어왔고 그 안에 각종 오물이 담겨 있으므로 당연한 비판이다. 그런데 이는 북한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북쪽으로 살포된 대북 전단 뭉치는 정권 타도와 주민 봉기를 촉구하는 적대적이고 위협적인 내용들을 담고 있다.
어떤 명분에서도 역외 혹은 국경을 무단으로 침범하는 행위는 국제법과 정전협정에 위배된다. 국제법의 토대인 유엔 헌장에는 모든 회원국의 주권평등 원칙이 명시돼 있다. 상대방 영토와 영공에 전단이나 오물을 보내는 것 자체가 주권 침해일 수 있다. 국가 간 상호 주권 존중은 국제 규범의 기본 원칙이다. 마찬가지로 상호 비방이나 중상도 국제법으로 금지된 사항이다. 그러니 제3자가 보기에, 남북이 모두 잘못이고 국제법 위반인 것이다. 뒤집어 말하면, 국제법 준수가 사태 해결의 열쇠라는 의미가 된다. 국제 규범까지 들먹이지 않더라도 이는 상식의 문제다. 양쪽 모두 자제해야 옳다.
사실 오물 풍선을 막는 길은 간명하다. 대북 전단이 북으로 날아가지 않도록 하면 된다. 정부는 대북 전단 살포를 통제할 수 있는데도 제대로 관리하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는다. 민간 단체의 전단 살포를 제지하지 못하는 근거로 드는 것이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이다. 헌재는 지난해 9월 대북 전단 살포를 금지한 남북관계발전법에 대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취지로 위헌 결정을 내린 바 있다.
이 결정에 대해서는 좀 더 깊은 이해가 요구된다. 접경 지역 주민의 안전 보장을 위해 현행 ‘경찰관 직무집행법’을 통해서도 전단 살포의 제지가 가능하다는 점, 살포 전 관계 기관 신고 의무화 같은 대체 입법 조치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는 내용이 함께 포함돼 있다. 헌재는 대북 전단 살포를 표현의 자유라고 규정했지만 당국이 이를 제지할 수 있다는 점도 함께 명시한 것이다. 그런데 정부는 ‘표현의 자유’만 강조해 대북 전단 관리에 손을 놓고 있다. 의도적으로 방기하고 있다거나 아예 충돌을 유도하는 것은 아니냐는 등의 의혹이 나오는 이유다.
오물 풍선은 어쩌면 북한이 우리를 얕잡아 보고 던져 놓은 덫 혹은 미끼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목적은 한반도 긴장을 고조시키는 데 있다. 우리가 여기에 말려들 이유가 없다. 오히려 오물 풍선 같은 저급한 심리전에 기대는 북한의 처지를 측은히 여겨야 한다. 역사적으로 북한이 대결을 부추겼지만 우리는 의연히 대화를 주도해 왔음을 기억하자. 힘에 의존하는 압박을 고집해서 얻을 이득은 별로 없다. 감정을 자극하는 적대행위가 쌓이면 위험한 상황으로 갈 뿐이다. 만일 불필요한 갈등과 충돌이 계속된다면 그건 정부의 무능을 뜻한다. 세상에 부끄러운 일이다.
2024-06-11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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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수의 지금 여기] 홍세화, 그리고 진보정당의 길
지난 부산 총선 현장에서 강렬한 인상을 남긴 지역을 꼽을 때 연제구를 빼놓기 힘들다. 노정현 후보의 선전은 소수정당인 진보당의 기치 아래 거둔 결실이라는 점에서 놀라운 것이었다. 노 후보는 여론조사 때마다 오차범위 밖 우세로 1위를 달리면서 한때 2위 국민의힘 후보와의 격차를 20%P 가까이 벌리기도 했는데, 부산에서는 말 그대로 전대미문의 이변이라 할 만했다. 야권 단일화 경선 승리가 주효했다는 분석, 결국 개인의 역량이 일궈낸 성과라는 진단 등이 나왔다. 어쨌든 노 후보는 이를 동력 삼아 내처 당선의 문턱까지 내달렸던 것이다.
물론 총선 결과는 예상과 달랐다. 보수 표심의 막판 결집 때문인지 노 후보는 8.83%P(1만 1109표) 차이로 낙선했다. 부산에서 진보정당의 첫 국회 진출을 기대했던 사람들도 낙담했다. 행정·사법 기관이 몰려 있고 중산층이 많이 거주하는 연제구는 1996년부터 2012년까지 보수정당이 승리한 지역이다. 기존 진보정당들이 기반으로 삼았던 곳과 정치 지형이 사뭇 다르다. 여기서 진보정당의 이름으로 절반 가까운 표를 얻었으니 당락을 떠나 역사적 사건임에 분명하다.
이 장면은 이번 총선의 또 다른 안타까운 장면과 교차하면서 부딪친다. 진보정당 최초로 5선에 도전했던 심상정 의원의 총선 패배와 정계 은퇴 선언. 정의당은 녹색당과 합당해 새로운 길을 모색했으나 단 1석도 얻지 못한 채 20년 만에 제도권 바깥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거대 양당의 거센 대립 구도를 감안한다 해도 충격적인 성적표가 아닐 수 없다. 녹색정의당만의 문제가 아니다. 진보정당의 몰락은 이번 총선 결과가 만든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진보당이 지역구 1석을 획득한 것이 전부다.
얼마 전 타계한 홍세화 선생을 떠올리는 건 그래서 자연스럽다. 이념과 진영의 오른쪽은 물론이고 민주 세력 나아가 진보 좌파에 대해서도 엄정한 비판을 아끼지 않았던 고인의 생애가 겹치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 ‘똘레랑스’(관용) 개념을 전했던 작가이자 언론인·사회운동가로서의 삶 자체가 자유와 평등을 향한 여정이었다. 그는 나이·경력·권위 따위를 내세우지 않았고 학연·지연에서 자유로웠다. 2011년 진보신당 당대표에 출마할 때 진보정당을 상징하는 노회찬 의원 등 핵심 인물들의 탈당을 매섭게 질타한 일화는 유명하다. 그에게 똘레랑스는 무조건적 관용을 뜻하지 않는다. 똘레랑스 안에 기본적으로 비판적 정신이 내재돼 있다는 의미다.
살아생전 그가 귀히 여긴 또 하나의 덕목은 ‘실천’이다. 무수한 강연과 대화에서 그는 설파했다. “행동으로 증명되지 못한 도덕적 우월감은 위선이자 도덕의 개념을 타락시키는 죄악이다.” 입으로는 진보를 말하면서 소유와 권력의 욕망에 사로잡힌 ‘586 세대’의 타락을 아프게 꼬집은 것도 그런 연유에서다. 이성과 계몽의 힘을 신뢰하면서도 이론적 사유에 머물지 않고 그것을 몸으로 직접 실행에 옮기는 실천가. 이게 그의 진면목이었다.
생의 끝자락에 이르러 마지막 남긴 한 마디는 ‘겸허함’이었다고 한다. 냉철한 비판도 중요하고 철저한 실천도 소중하지만, 인간이 세상을 대하는 태도의 핵심은 겸손이어야 한다는 것. 자신을 낮추고 스스로를 성찰하면서 세상을 헤아렸던 고인의 삶이 바로 그랬다. ‘오늘날 좌우 진영이 공히 겸손을 모르는 오만함에 빠져 있는 건 아닌가.’ 돌아보면 그의 삶과 죽음이 온통 그런 경종으로 들린다.
대한민국의 진보정치가 소멸의 위기에 내몰렸다는 우려 섞인 전망이 파다하다. 거대 양당의 완고한 대립 구도라는 외적 요인의 영향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자기 정체성을 제대로 세우지 않고 구현해 내지 못한 내부적 요인도 크다. 삶의 현장에서 다양한 가치를 의제로 만들어내야 하는 진보정치의 소임은 여전히 막중하다. 노조 바깥의 영세 기업 노동자들이 있고, 심화하는 사회 양극화로 소외되고 차별받는 계층이 존재한다. 진보정당이 있어야 할 곳은 이런 자리다. 보다 낮은 곳에서 공동체의 그늘과 약자들의 아픔을 챙겨야 한다. 국회 의석을 못 얻었다고 해서 진보정당이 설 자리를 잃었다는 건 잘못된 시각이다. 특정 계층과 이슈를 대변하는 정책 정당으로서의 가능성은 흔들림 없이 타진돼야 한다.
지금 거대 양당의 극단적 대립으로 인한 폐해는 실로 심각하다. 고착화하는 양당 독점 구도를 깨고 다양성이 대변되는 사회로 한 걸음 더 나아가기 위해서라도 진보정당의 길은 다시 열려야 한다. 이 시점에서 이탈리아 철학자 안토니오 그람시의 통찰을 되새길 필요가 있겠다. 생전에 홍세화 선생도 곧잘 언급했던 말이다. ‘이성으로 비관하더라도 의지로 낙관하라.’
2024-05-02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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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수의 지금 여기] 겸손과 반성 vs 아집과 교만
쉬이 제 몸을 드러내지 않는 봄이다. 터지지 않는 꽃망울, 그 망설임의 연유를 한낱 인간이 알 길은 없다. 꽃 축제를 연기해야 한다는 전갈, 그래서 전국의 지자체들이 골머리를 앓는다는 뉴스가 봄소식을 앞지를 뿐이다. 무슨 까닭이 있을 것이다. 봄의 더딘 걸음은 어쩌면 인간의 조급함을 시험하기 위한 건 아닐까. 지긋이 기다리면 될 일, 어찌 그리 안절부절못하느냐는 대자연의 귀띔 아닐까.
조급과 미숙의 난장으로 치자면, 지금의 대한민국 총선 현장만 한 곳을 찾기 힘들다. 선거가 불과 일주일 앞인데, 제대로 된 정책 경쟁은 실종 상태다. 대신 무분별한 선심성 공약과 허술하고 어설픈 정책, 상대를 낮추보는 막말·욕설이 난무한다. 실력으로 딱히 내세울 게 없으니 네거티브로 반사이익을 취하겠다는 혐의가 짙다. 민생을 말하지 않는 역대 최악의 공허한 선거라는 진단까지 나오는 마당이다.
이번 총선 구도는 ‘정권 심판론’과 ‘정권 지지론’의 대결이라고 한다.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총선 판도는 야권의 대체적인 열세로 분석됐다. 앞서 친명(친이재명계) 위주로 이뤄진 더불어민주당의 공천 부조리가 국민들의 공분을 부른 터였다. 그런데 분위기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그 짧은 시간 야당이 특별히 잘한 게 없는데도 야권의 상당한 우세로 판도가 기울었다. 여기에는 부산·경남의 요동치는 민심도 포함된다. 대체 어찌 된 영문인가.
그 원인을 윤석열 대통령의 고집스러운 국정운영에서 찾는 사람이 많다. 이른바 ‘이종섭·황상무 논란’이 대표적이다. 특히 이종섭 호주대사 사태는 모든 게 의문투성이다. 피의자 신분, 출국금지 상태에서 임명돼 논란을 빚은 지 25일이나 흐른 뒤에야 사퇴가 결정됐다. 잘못 끼운 첫 단추를 서둘러 바로잡지 않고 고집을 부리다 수렁에 빠진 케이스다. 국민 눈높이에서 한참을 벗어난 ‘측근 감싸기’였음은 물론이다.
돌아보면 유사한 사례가 한둘이 아니었다. 김건희 여사 명품 가방 의혹, 연구·개발(R&D) 예산 삭감과 ‘입틀막’ 사건, 채모 상병 사망 수사 외압 의혹, 최근의 의·정 갈등까지. 한때는 지지율에 연연하지 않는 대통령의 모습이 우직, 대범, 뚝심으로 비치기도 했다. 지금은 독선과 불통의 산물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최근의 의료 사태를 대하는 태도도 그렇다. 미리 정답을 정해놓고 밀어붙이니 반발을 부를 수밖에 없다. 방향이 틀렸다는 게 아니다. 섬세한 디테일과 유연한 리더십으로 뜻한 바를 이룰 수 있는 정치적 조정 능력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대파 한 단 값 875원’은 24차례의 민생토론회가 얼마나 허망한 자리였는지 여실히 보여준 사건이다. 정치 지도자라면 보다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조언 듣기를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 이를 외면하는 것을 오만이라 한다.
대통령의 행보를 제어해 바른길로 이끌지 못한 집권여당도 문제다. 줄곧 논란이 됐던 당정 관계의 회복이 성공한 것 같지도 않고, 선거 국면에서의 리더십도 별 성과를 내지 못하는 듯하다. 게다가 선거가 막판으로 치닫자 흠집내기식 막말이 늘어나는 형국이다. “쓰레기” “개 같은”을 내뱉는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의 험한 입은 자충수에 가깝다. 조급함 속에서는 좋은 정책이 나오기도 힘들다. 그래서인지 공약 중에는 재원 마련 방안이 없거나 세수 펑크가 우려되는 것들이 많다. 선심성 포퓰리즘 공약으로 표심을 노리는 건 유권자에 대한 기만이다.
그렇다면 야당은 잘해서 지지율 반전의 덕을 본 걸까. 결코 그렇지 않다. 대통령과 여당의 헛발질이 심하다 보니 나라의 장래를 걱정한 국민들의 어쩔 수 없는 선택지가 됐다는 분석이 중론을 이룬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언설과 행동은 이미 교만의 온상, 막말의 발원지라는 비판을 받은 지 오래다. ‘대장동 재판’이나 ‘비명횡사’ 공천 등 당 안팎의 첨예한 사안에 대해 개인 혹은 당 대표로서 이렇다 할 반성과 사과의 메시지를 내놓은 적이 없다. ‘2찍’이나 ‘강원도 폄하’ 발언은 특히 실망스럽다. 지역감정 타파는 민주당 정체성의 뿌리를 이루는 상징과도 같다. 국민과 특정 지역을 우습게 보는 태도는 절대 용납될 수 없다.
민심 이반은 그 어떤 특별하고 거대한 사안 때문에 일어나는 게 아니다. 사람 마음 밑바닥의 이런 오만과 불손에서 비롯한다. 대통령이든 여당 대표든 야당 대표든 지금까지 ‘미안하다’거나 ‘반성한다’고 진심 어린 말을 하는 걸 보지 못했다.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한을 낮은 자세로 민의에 따라 받들어 수행하는 것. 여기에 국민의 마음을 얻는 길이 있다. 이번 총선 구도는 ‘정권 심판’ 대 ‘정권 지지’라기보다는 ‘겸손·반성’ 대 ‘아집·교만’으로 보는 게 옳다. 최종 판세는 언제든 뒤집힐 수 있다.
2024-04-02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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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수의 지금 여기] 생명 다루는 의사들이 그럴 리 없다
대동강물이 풀린다는 우수가 한참 지났다. 겨울잠에서 깨어난 천지만물이 기운생동하는 절기. 동토를 견딘 풀과 나무들이 볕 좋은 뒷산 언덕에서 싹 틔우는 소리 들리는 듯하다. 봄이 한창 몸 풀 채비에 분주하니, 온 세상은 이내 울긋불긋 꽃 천지로 흐드러질 테다.
봄 기지개가 이리 반가운 이들이 한둘이겠냐만, 겨우내 병을 앓은 사람들만 할까. 만물이 깨어나는 이즈음은 육신의 고통으로 서러웠던 환자들이 회복과 치유의 간절한 기도를 올리는 시즌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 의료 현장은 꽁꽁 얼어붙어 아직도 차갑고 혹독한 겨울이다. 의사들의 집단행동으로 의료 공백이 장기화할 우려가 커지면서 국민의 건강권이 위기에 처했다는 답답한 소식이 봄의 길목을 가로막는다.
안타까운 마음에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찾아본다. 의료인이 지켜야 할 이 윤리강령은 고대로부터 전승돼 오다 1948년 세계의사협회의 ‘제네바 선언’으로 확립된 이래 여러 차례 수정돼 지금에 이른다. 그중 가장 눈길 끄는 대목. ‘나는 환자의 건강과 생명을 첫째로 생각하겠노라.’ 이런 내용도 있다. ‘나는 인종·종교·국적·정당·사회적 지위 여하를 초월해 오직 환자에 대한 의무를 지키겠노라.’ 의사의 본분은 생명을 최우선시하는 고귀한 뜻에 있다는 것. 이는 의료가 돈이나 명예를 넘어선 초월적 숭고함의 영역임을 의미한다.
우리나라 의사들이라고 다르지 않다. 그런데도 의료 현장을 떠나는 집단행동에는 그럴 만한 뜻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역사적 사례로부터 그것을 살필 수 있다. 의약분업 정책에 맞선 2000년, 원격 의료에 반대한 2014년, 코로나19 사태 때 의대 정원 확대를 막은 2020년. 그때마다 의료계는 단체적으로 저항했는데, 국민들은 그 연유를 따져 묻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의사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근본적 질문이 그것이다. 의사들은 그렇게 의료계 내부 모순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국민들에게 각성의 계기를 제공했다. 소중한 공로다.
현재 전국에 번진 의료 공백 사태는 전공의들이 앞장선 4년 전과 많이 닮았다. 당장 3월에는 전임의와 교수들마저 병원을 떠날 가능성이 점쳐진다. 환자들의 피해 확산과 의료 대란의 격화는 예정된 수순이다. 하지만 의사들은 이번 사태 속에서도 역설의 진리를 드러내는 데 기여한다. 2024년 의대 정원은 35년 전과 비슷한 규모인데 그 기간 한국의 인구는 21.9% 증가했다는 점, 노인 인구가 5배 늘어나는 동안 의사 인력은 동결됐다는 점, 인구 1000명당 의사 수가 한국은 2.6명으로 일본(2.6명)이나 미국(2.7명)과 비슷하다는 의사단체의 설명은 알고 보면 한의사까지 포함한 것으로, 한의사를 제외하면 의사 수는 2.18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제일 적다는 점 등등. 의사들이 집단행동으로 강경하게 이슈화하지 않았다면 몰랐을 사실들이다.
시간이 지나야 보이는 것들이 있는데, 그걸 깨닫게 해 준 기여도 있다. 우리나라 응급·필수 의료체계를 떠받치는 전공의 체제가 그것이다. 전공의는 집단행동 때마다 반복되는 의료 공백의 장본인이다. 극심한 노동 강도에 시달리면서도 의대 정원 확대에 앞장서서 반대하는 모순적 행동을 보이는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나중에 전문의가 돼 개원하면 고소득을 보장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기형적 의료 구조를 바꾸지 않는 한 사태의 근본적 해결은 난망하다. 이렇게 한국 의료의 민낯이 드러날 수 있었던 것은 전공의들이 근무지 이탈을 통해 직접 몸으로 증명한 덕분이다.
의사는 우리 사회의 엘리트다. 생각 없이 집단행동에 나설 리가 없다. 끝내 파국의 길을 걷고자 원할 리도 없다. 부조리한 현실을 보여줌으로써 스스로 반면교사의 사례가 되고, 국민들에게 그 심각성을 각인하려는 큰 뜻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고 봐야 한다. 일부는 소중한 일터까지 과감히 포기했으니 그야말로 ‘살신성인’이다. 의료인들의 숭고한 의지, 헌신과 공로를 잊어선 안 되겠다.
한 가지 부연하고자 한다. 집단행동 같은 극단적 수단을 통해 자신의 의지를 실현하려는 의사들이 있는 반면, 어떤 일이 있어도 의료 현장을 떠나지 않는 의사들도 있다는 사실이다. 사람의 생명과 목숨을 최우선 가치로 받들라는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묵묵히 실천하는 의사들. 이들이 의사의 대다수를 차지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렇다면 이들이야말로 대한민국 의사들의 의중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이제는 대화를 통해 공감대를 넓히는 방향으로 사태 해결의 실마리를 풀어야 할 때다. 현장을 떠난 의사들은 더 늦기 전에 복귀하는 게 옳다. 집단행동으로 보여준 의사들의 참뜻은 이미 국민에게 다 전달됐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2024-02-27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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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수의 지금 여기] 행복한 대통령의 길
2020년 출간된 〈한국의 불행한 대통령들〉은 우리나라에서 박수받고 퇴임하는 대통령이 드문 이유를 살핀 책이다. 역대 대통령들을 국내 정책·외교·언론·리더십 같은 다양한 측면에서 분석한 결과가 그 근거다. ‘대권’이라는 말에서 드러나듯 한국의 대통령제는 ‘제왕적’인데, 최고 통치권자가 무소불위의 힘으로 자기 생각을 밀어붙이는 행태야말로 불행의 주된 원인이라는 게 책의 요지다.
이 책의 화두가 지금 눈길을 끄는 이유는 22대 총선이 불과 두 달 반 앞으로 바싹 다가와서다. 한국의 정치 구조상 대통령과 총선의 역학관계는 정권의 명운을 좌우하는 중대 요소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현재 대통령실과 정부·여당의 움직임이 그 어느 때보다 분주한 것도 그런 이유다.
이즈음 윤석열 대통령의 행보는 두 개의 키워드로 요약된다. ‘법률안 거부권’과 ‘선심성 정책’이 그것이다. 그런데 거부권은 정치 공세에 대한 정당한 행사로 인식되고, 선심성 정책은 ‘민생’을 위한 것으로 포장된다. 여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는 지금까지 여덟 차례를 기록 중이다. 양곡법, 간호법, 노란봉투법, 방송3법(방송법·방송문화진흥회법·한국교육방송공사법)과 이른바 ‘쌍특검법’(김건희 여사 도이치모터스 주가 조작 의혹 특검법·대장동 50억 클럽 특검법)이 그 목록이다. 현재 고심 중인 이태원 참사 특별법에 대한 거부까지 더해지면 9회가 된다.
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는 역대 대통령(이승만 43회, 박정희 7회, 노태우 7회, 노무현 6회, 이명박·박근혜 각 1회)의 사례와 비교해도 한참 과하다. 이승만 전 대통령을 제외하면 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가 단연 최다다. 아직 대통령 임기가 절반 이상 남아 있는데도 말이다. 거부권은 헌법에 규정된 대통령 고유 권한이지만 위헌 혹은 국익 침해 등 헌법적으로 정당한 사유가 있어야 한다. 거부권이 ‘전가의 보도’가 된 이 상황이 과연 정상적인지 의문이다.
특히 ‘김건희 특검법’ 반대는 거부권 논란의 핵심을 이룬다. 모든 의혹을 털어낼 기회를 대통령 스스로 저버렸다는 점에서 그렇다. 무엇보다 국민 70% 이상이 이 법안을 찬성하고 65% 이상이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를 반대한다. ‘김건희 리스크’는 최근 명품 가방 수수 의혹까지 겹쳐 윤 대통령과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의 정면충돌로 번진 상황이다.
결국 거부권 남용은 자신과 다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독단’의 의미로 읽힐 수밖에 없다. 대통령이 국민 여론이나 민심의 자장으로부터 점점 멀어져가고 있다는 의미다.
거부권 행사의 반대쪽에 ‘선심성 정책’이 있다. 이 둘은 동전의 양면처럼 보인다. 지난 한 달여 사이 쏟아진 감세·현금성 지원 관련 정책이 20여 건에 이른다. 금융투자소득세 폐지, 증권거래세 인하,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 비과세 한도 대폭 상향, 상장기업의 기업 승계를 돕는 상속세 완화 시사 등등. 이전에 수시로 발표한 세금·전기요금·은행 이자 인하 등 대책까지 합치면 단순 나열하기에도 숨이 벅차다.
문제는 ‘민생 안정’이라는 당위만 있지 치밀한 준비 끝에 나온 정책이 아니라는 점이다. 체계적이고 일관된 정책 결정 과정보다는 일시적 성격의 행사에서 즉흥적으로 발표되는 일이 잦다. 대통령실에서 모든 정책을 결정하고 총리를 비롯한 각 부처 장관은 하달된 정책의 집행 기구에 불과하다는 의혹이 여기서 나온다. 그렇지 않다면 주무 부처가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정책 혹은 갑자기 기조가 바뀌는 정책이 나오는 이유를 설명할 길 없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선심성 정책 안에 아무런 재원 대책이 없다는 데 있다. 세수 규모가 크게 줄어들 수밖에 없는 대목에 대해서도 별다른 설명이 없다. 대부분 법 개정이 필요한 사안이라 실현 가능성에 대한 의문도 제기된다. 결국 총선을 앞둔 ‘포퓰리즘’이라고밖에 볼 수 없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책 〈한국의 불행한 대통령들〉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규정된 임기 안에서 한시적 권한을 위임받은 대통령이 해야 할 일은 과거의 업적을 이어받아 좋은 점은 더욱 발전시키고, 다른 한편 잘못된 점은 시정하는 것이 원칙이어야 한다.’ 그동안 한국 대통령의 말로가 불행했던 건 저 원칙을 도외시했기 때문이다. 대개 자기편 잘못은 감싸고 상대편은 악(惡)으로 여겨 타격했다. 그 틈새로 측근들의 호가호위, 계파 정치, 연고·학벌주의가 판을 쳤다. 윤 대통령과 현 정부의 잦은 거부권 행사와 설익은 선심성 정책이 이런 폐해를 가리기 위한 방편이 아니길 바란다. 대통령의 불행은 나라와 국민의 불행이다. 불행은 겪을 만큼 겪었다. 민심과 국정을 외면한 채 불행의 길로 들어서는 대통령은 더 이상 없어야 한다.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busan.com
2024-01-23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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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수의 지금 여기] 자식을 먼저 보내는 슬픔
한 해를 돌아보는 계묘년의 끝자락이다. 늘 그렇듯, 만족과 성취감보다는 반성과 후회가 더 수북한 높이로 쌓이는 시간이다. 밀실(개인)에서도 그렇고, 광장(사회)에서도 그렇다. 올해도 이 땅에는 무수한 죽음이 있었다. 죽음은, 그리고 그것을 지켜보는 일은 극한의 고통이다. 왜 그런가. 망자는 우리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면식도 없는 이의 죽음 앞에서 상실감 혹은 통증을 느끼는 건 그런 이유다.
히라노 게이치로라는 일본 소설가는 말했다. 인간에게는 여러 종류의 ‘나’가 있다고. ‘나’란 나눌 수 없는 ‘개인(individual)’이 아니라 여러 가지의 ‘나’, 즉 ‘분인(分人·dividual)’들로 존재한다고. 분인은 수많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 각각 특별하게 작동하는 ‘나’ 중의 하나다. ‘나’는 그런 분인의 집합체인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단순히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게 아니다. 그 사람과의 관계로 탄생한 나의 분인을 사랑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분인이란 말이 어색하다면 분신으로 읽어도 된다.
사람을 잃는 일도 마찬가지다. 한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을 통해서만 가능했던 관계는 사라진다. 나의 분신, 곧 나의 일부를 잃는 것과 같은 것이다. 내 삶에 가장 중요했던 사람이 죽는 경우라면, 나 중 가장 중요한 나도 죽게 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 앞에서 그토록 고통스럽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가운데 가장 큰 고통은 자식의 죽음일 것이다. ‘천붕지통(天崩之痛)’으로 불리는 부모의 죽음이 있고, 가깝게 지내던 친구와 동료의 죽음도 안타깝지만, 이 슬픔이 제일 크다. ‘참척(慘慽)’이라 했다. 죽음을 어찌 등급 지을 수 있으랴만,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의 ‘참혹한 슬픔’보다 큰 것은 없다.
일찍이 충무공 이순신은 아들 면의 전사 소식에 “온 세상이 깜깜하고 해조차 색이 바래 보인다”고 했다. 정신분석학의 대가 프로이트도, 한국 현대시의 선구자 정지용도, 세계적인 기타리스트 에릭 클랩턴도, 현대문학의 거목 박완서 소설가도 참척의 고통으로 통곡했다. 그런 부모는 죽지 못해 산다. 주변을 둘러보면 자식을 앞세운 부모들이 의외로 많다.
다시 돌아본 올해 한국 사회는 참척의 아픔으로 그늘졌다. 생때같은 젊은이들의 죽음이 여전했다. 지난 7월 서울의 한 초등학교 20대 교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교권 추락이라는 현실에 더해 과중한 업무, 학교의 무관심, 학부모의 폭언이 뒤섞여 젊은 교사를 사지로 내몰았다. “우리는 국가에 대한 의무를 다했는데, 왜 국가는 우리 가족을 지켜주지 못하나.” 유가족은 오열했다. 지난 9월 대전에서도 초등학교 교사가 수년간 학부모 민원과 괴롭힘에 시달리다 유명을 달리했다.
군대가 젊은이들의 무덤인 것도 여전했다. 지금은 군사정권 시절이 아닌데도 의문사나 사고사 혹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례가 늘고 있다. 최근 5년간 군인 자살 사고만 320건에 달한다. 불과 얼마 전에도 최전방 부대 소속 육군 소대장의 자살 정황이 뉴스에 보도됐다. 지난 7월에는 채 모 상병이 집중호우 실종자 수색 중 순직했다. 발생해서는 안 될 이른바 ‘인재(人災)’였으나 책임지는 사람은 없었다. 후진적 군대 문화, 지금도 별반 나아진 게 없는 것이다.
젊은 노동자들의 일터인 산업 현장도 다르지 않았다. 2018년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일하다 사망한 김용균 노동자의 죽음 이후 중대재해처벌법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경영자의 책임을 말단 실무자에게 전가하는 관행과 악습은 반복되고 있다. 노동자 50인 미만 사업장에 대한 법률 적용은 또다시 미뤄질 조짐이다.
이태원 참사가 불과 1년 2개월 전이었다. 이런 사회적 참척 이후에도 이 땅을 떠나는 젊은이들이 끊이지 않는다. 군부대와 산업 현장, 학교 일선 등 도처에서. 이뿐만 아니다. 정신건강은 우리 사회의 잠재적 불안 요소다. 특히 10·20대 청소년·청년들이 마음의 병이 깊어간다. 우울증·조울증·강박증 같은 정신질환 환자군에서 청년층 비중이 커지고 있음을 통계 자료는 가리킨다.
인구절벽 시대를 맞아 저출산 대책이 비명처럼 쏟아지고 있다. 암울한 현실과 부정적 전망을 부인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우리 옆에 있는 젊은이들부터 지키는 것이 먼저다. 저 모든 ‘사회적 타살’로부터 지금 당장 그들을 보호해야 한다. 우리 곁의 젊은 생명들이 꺼지지 않도록 손을 내미는 게 급선무다.
한 사람의 죽음은 그 사람의 주변으로 무수히 뻗은 분신 사이의 연결을 파괴한다. 젊은이의 죽음이라면 ‘나’가 또 다른 ‘나’와 만날 그 무한한 가능성까지 없앤다는 걸 의미한다. 젊은이의 죽음은 그래서 막아야만 하는 것이다. 결국, 이것이, 인간이 인간인 이유다.
2023-12-21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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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수의 지금 여기] 통합의 정책? 분열의 정치!
파장이 거세다. 여당발 ‘김포시 서울 편입’ 이슈를 말하는 것이다. 온 나라가 벌집 쑤신 듯 시끄럽다. 그래서 알 수 있다. 저 논의가 겉으론 통합의 언어지만 사실은 분열의 언어라는 걸.
정부와 여당의 엇박자가 우선 이해 안 된다. ‘김포 서울 편입론’이 제기된 시기는 정부가 제1차 지방시대 종합계획을 발표한 때와 겹친다. ‘지방자치 및 균형발전의 날 기념식’을 열어 지방정책의 방향을 밝히고 중요성을 강조한 게 그 다음날이다. 한쪽에서는 진정한 지방시대를 열겠다는데, 한쪽에선 수도권을 더 확장하겠다 한다. 양쪽의 교감이 있었다면 국민에 대한 기만, 소통이 없었다면 당정의 깊은 분열을 의미한다. 이 중차대한 사안을 두고 당정이 따로 놀다니 무슨 영문인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있다. 설익은 아마추어적 발상이라는 사실이다. 김포 시민의 61.9%가 서울 편입을 반대하고 있다. 당내에서조차 의견이 충돌한다. 반발하는 여당 소속 수도권 지자체장들이 적지 않다. 그렇거나 말거나, 김포 서울 편입론은 한술 더 떠 ‘메가시티 서울’로 확장할 태세다. 서울은 이미 세계적 메트로폴리스이고 거대도시인데 또 ‘메가 서울’이라니! 반대 여론을 의식한 여당 대표는 ‘당근’ 정책까지 흘렸다. 비수도권에도 메가시티 조성을 추진하겠다는 것이다.
부울경 지역의 아픈 과거를 돌이켜본다. 메가시티 논의가 한창일 때, 수도권과 정치권은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소멸 위기에 빠진 지방 처지에서 메가시티는 생사의 문제였다. 힘을 합쳐서 난관을 극복해 보려는 지역의 발버둥이었다. 부울경 메가시티 논의는 그 중요성에 비해 주목받지 못했다. 당시 수도권 언론은 대부분 단신으로 처리했다. 그렇게 홀대받았고 곡절 끝에 좌초한 부울경 메가시티가 9개월 만에 다시 거론된다. 기쁜 일인가? 그럴 리가 없다. 지방이 죽고 사는 문제마저 수도권 의제를 기폭제 삼아야 겨우 관심을 끌 수 있다는 것, 지역으로서는 실로 서글픈 일이다.
이것만 봐도 김포 서울 편입론은 참 나쁜 정책임을 알 수 있다. 이를 뒷받침할 논리는 무수히 많다. 가장 심각한 해악을 꼽으라면, 분열과 갈등의 조장이다. 김포가 서울과 맞닿은 곳은 아주 일부다. 생활권역을 따져 서울 편입이 필요하다면 구리·하남·광명·과천 등이 더 급하다. 결국 다른 도시들을 자극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그 의도가 불순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전체 도시계획이나 주민 의견수렴 등의 절차는 뒷전으로 밀리고, 정치적 관점에서 사안이 결정되는 이것이 정상인가.
수도권 안에서만 그런 게 아니다. 전국의 도시들이 덩달아 들썩이고 있다. 부울경 메가시티는 지금 좌초 책임을 놓고 갑론을박 중이다. 책임을 따지는 일이 무의미하다는 뜻이 아니다. 수도권 확장론이 쳐놓은 분열의 그물망에 지역이 걸려드는 게 두려운 것이다. 이 역시 부울경만의 일은 아닐 테다. 분열의 불꽃이 타 지역으로 옮겨붙을 수 있다. 지역 갈등의 또 다른 불씨가 되는 건 아닌지 걱정이다.
이번 이슈의 두 번째 폐해는 수도권 확장 논리를 정당화하려는 노림수다. 나라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망국적 수도권 일극주의는 지역에서 줄기차게 비판해 온 타깃이다. 이번 이슈가 전국에 메가시티를 던져주고 더 큰 ‘메가 서울’이라는 큰 그림을 염두에 둔 것이라면 사태는 심각해진다. 메가 서울과 전국의 메가시티가 같이 간다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인지는 일단 차치하자. 문제는 수도권 확장에 대한 비판 논리가 무화되거나 최소한 암묵적 동조로 흐를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일부 언론들은 ‘메가 서울을 오히려 지역에서 더 환영한다’는 식으로 보도한다. 수도 없이 강조해 왔듯이, 지역 메가시티의 핵심은 수도권 확장을 억제하고 국토를 균형 개발하는 데 있다. 이런 본질을 놓친다면 그것은 수도권 확장의 ‘들러리’일 뿐이다.
이번 이슈의 또 다른 나쁜 점은 지역 이기주의를 부추긴다는 데 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우리도…” “지역에 ‘특별한’ 혜택이 주어진다는데…” 같은 말들이 자꾸 들린다. ‘우리만 살면 된다’는 식의 이기적 욕망을 이용하는 정책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지역으로서는 수도권 중심주의를 비판하는 논리가 또 다른 지역 패권주의로 빠지는 걸 경계해야 한다. 지역 균형발전의 진정한 의미는 다 함께 잘살자는 것이다. 수도권 일극주의를 해체하지 않고서는 이 나라의 미래는 없다는 사실. 이는 균형발전의 기본 원칙과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집권 세력은 우리 국민들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국민들은 집권 세력이 내놓은 정책들을 또 어떻게 보고 있을까. 여러 가지 생각과 질문이 교차하는 요즘이다. 총선에서 시민들이, 국민들이 지혜롭게 응답하리라 믿는다.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busan.com
2023-11-14 [18: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