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바티칸 '스위스 근위병'
근위병이라 하면 대개 영국 버킹엄궁을 떠올릴 것이다. 정제된 교대식과 붉은 군복, 커다란 털모자는 영국을 가보지 않은 사람도 쉽게 알아볼 만큼 상징적이다. 그러나 이들 못지않게 눈길을 끄는 화려한 복장의 근위병이 있다. 바로 바티칸 교황청의 근위병이다. 파랑·노랑·빨강 줄무늬가 어우러진 르네상스풍 제복과 붉은 타조 깃털이 달린 투구. 바티칸 성베드로대성당을 찾는 이라면 누구나 그들의 모습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게 된다. 마치 무대의상을 입은 것처럼 보이지만 이들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군대의 병사들이다.
교황청 근위대에 ‘스위스’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의외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역사는 150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교황 율리오 2세가 150명의 스위스 용병을 불러 창설한 것이 시초다. 스위스인만으로 구성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1527년 당시 교황 클레멘스 7세 시절 신성로마제국 군대가 로마를 침공했을 때 이들은 끝까지 남아 교황을 지켰다. 189명 중 147명이 전사했음에도 교황을 안전하게 대피시킨 그들의 충성은 이후 스위스 출신만 근위병으로 선발하는 전통으로 이어졌다.
교황청 근위대는 오늘날에도 소수 정예로 운영된다. 이들의 주 임무는 교황청 각종 의식과 행사에서 전통 의상을 입고 의전을 수행하는 것이다. 교황 경호는 물론, 귀빈 방문 시 의전과 사도좌 공석 시 추기경단 안전까지 책임진다. 근위병이 되려면 스위스 국적 19~30세 미혼 남성 가톨릭 신자로 키 174cm 이상, 군 복무와 고등교육 이수, 신앙과 체력 검증을 통과해야 한다. 그들의 화려한 제복은 충성과 자부심, 500여 년의 역사를 상징하는데, 파랑과 노랑은 율리오 2세 가문 델라 로베레, 빨강은 메디치 가문 문장에서 유래했다.
최근 바티칸 스위스 근위대가 유대인 차별 논란에 휘말렸다. 외신에 따르면 한 근위병이 성 베드로 광장 입구에서 유대계 여성 두 명을 향해 침을 뱉는 시늉을 한 것이 발단이다. 조사 결과 교황청은 “반유대주의적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요소가 있었다”고 밝혔다. 공교롭게도 그 시기 교황 레오 14세는 1965년 종교 간 화합을 천명한 ‘노스트라 아에타테’ 선언 60주년을 맞아 방문객을 접견 중이었다. 그 선언을 기리는 시점에 교황청 한복판에서 반유대적 행위가 벌어진 셈이다. 근위병이 지켜야 할 것은 화려한 제복이나 교황의 신변 보호만이 아니다. 인간 존엄과 더불어 교황이 상징하는 ‘사랑과 관용’의 정신이다. 500년 전통이 다시 그 정신으로 빛나길.
정달식 논설위원 dosol@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