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병, 한국형 감정질환 아닌 심신질환

윤여진 기자 onlypen@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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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대한의학전문대학원 등 연구
타 정신질환과 손쉽게 구별 가능
화병 진행 메커니즘 세 단계 제시

그동안 한국 고유의 문화 결합 증후군으로만 여겨졌던 ‘화병’이 실제로는 보편적인 생물심리학적 메커니즘을 가진 심신질환이라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부산대 한의학전문대학원 채한 교수 연구팀은 경희대 한의과대학·강동한방병원 김종우 교수팀, 경성대 이수진 심리학과 교수팀과 함께 화병의 정신병리적 임상 특징을 규명한 연구 논문 ‘화병 환자의 심신증상에 내재된 보편적인 생물심리 프로파일의 분석’을 발표했다고 10일 밝혔다. 논문은 지난달 30일 국제 학술지 〈바이오피지코소셜 메디슨〉 온라인판에 게재됐다.

화병은 전통적 유교 문화와 한국인의 정서적 특질인 ‘한’이 결합해 형성된 것으로 알려진 질환으로, 분노·우울 같은 정신 증상과 함께 열감·가슴 답답함·목의 덩어리감 등 독특한 신체 증상을 동반한다. 국내 유병률은 4.2~13.3%로 중년 여성에게 흔하며, 2022년 건강보험심사평가원 통계에 따르면 환자 수는 1만 1587명에 달한다.

연구팀은 화병 환자 118명을 대상으로 한의학의 음양심리 이론을 표준화한 ‘사상성격검사(SPQ)’를 활용해 심신 증상과 생물심리학적 특성을 분석했다. SPQ는 행동 활성화(SPQ-B), 인지 유연성(SPQ-C), 정서 반응성(SPQ-E)의 세 가지 척도로 개인의 심리생리학적 특성을 평가하는 도구이다. 연구팀에 따르면 사상성격검사(SPQ)는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심리생리학적 구성 개념에 해당해 문화 간 적용이 가능하다.

분석 결과 화병의 심리적 증상 26%, 신체적 증상 14.3%가 SPQ 하위척도로 설명됐다. 특히 중증 화병 환자들은 높은 SPQ-B, 낮은 SPQ-C, 낮은 SPQ-E를 보이는 독특한 프로파일을 나타냈다. 특정 생물심리학적 소인을 지닌 사람이 감정 억압적 환경에 노출될 때 화병이 발현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연구팀은 화병의 진행 메커니즘을 세 단계로 제시했다. 1단계는 부정적 감정의 장기간 억제로 인한 심리생리학적 막힘, 2단계는 열감·가슴 답답함 같은 신체화 증상, 3단계는 미해결 스트레스가 임계점을 넘어 발생하는 폭발적 분노 반응이다. 이들은 이 같은 접근법이 필리핀, 일본, 인도 등 다른 문화권의 심신질환 연구에 적용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문화적으로는 한국형으로 표현되지만, 생물학적으로는 세계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진단 모델이 되는 셈이다. 채 교수는 “화병만의 독특한 정신병리 프로파일을 발견하면서 우울증 등 다른 정신질환과 손쉽게 구별할 수 있게 됐다”며 “이는 사상성격검사를 활용한 맞춤형 치료에도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윤여진 기자 onlypen@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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