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의 시선] 북한 '민족·통일 부정' 대응은
당위적 통일론 넘어 우리 주도로 평화 체제 구축해야
김정은 위원장 '특수 관계' 배척
헌법에 '교전 상태 적대국' 추진
경의선 육로에 지뢰 '경협 차단'
남한과 '헤어질 결심' 실천 중
북한 '동족 부인' 옛 동독 연상
서독, 끝까지 화해·교류 노력
평화 체제 구축에 주도권 중요
현실론·전략적 접근론 감안
'전쟁 없는 한반도' 새 전략 짜야
2007년 봄 서울을 떠난 버스는 불과 1시간 만에 북한 개성공단에 닿았다. 의료 봉사 단체 그린닥터스의 협력 병원 개원식 취재 차 부산 기업인 일행과 함께 군사분계선을 넘은 것이었다. 남북한을 넘나들 때는 여권 대신 통일부 장관이 발급한 ‘방문증명서’가 사용됐다. 그 과정은 ‘입국’, ‘출국’이 아닌 ‘입경’, ‘출경’이라 불렸는데 이 용어에 남북한의 특수한 관계가 녹아 있었다. 각각 유엔에 가입해서 국제 무대에서 엄연한 주권 국가였지만 1972년 7·4공동성명으로 각자의 체제를 인정하고 ‘대화를 통해 자주적 통일을 추구하는 특수한 관계’에 합의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뒤 체제 경쟁과 크고 작은 무력 충돌까지 신산의 고비를 겪었지만 그간 남북한 모두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었다. 내년이면 광복 80주년인데, 이 ‘특수 관계’는 그 모진 풍파를 견뎠다. 한데, 북한이 최근 이 ‘특수 관계’를 거부하고 나섰다. ‘민족·화해·통일’을 부정하는 것도 모자라 ‘교전 상태의 제1 적대국’ 운운하면서 이제 두 개 국가로 따로 살자고 나선 것이다.
한집 살림을 약속한 상대편이 박차고 나가 버린 셈인데, 이 대목에서 중요한 건 우리의 선택이다. 미국 대 러시아·중국 갈등과 맞물려 한미일 대 북중러의 신냉전적 대결 구조가 형성되려는 와중에 남북 관계 패러다임에 중대 변수가 생긴 것이다.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의 ‘2023 통일의식조사’에 따르면 통일 필요성에 긍정적인 비율은 43.8%로 2007년 조사 이후 최저치다. 우리 내부에서도 통일에 대한 열정이 식은 것이다. 이런 국내외 흐름을 감안하면 현재 우리가 선 이 지점이 자칫 영구 분단의 갈림길일 수도 있다. 낭만적 통일론을 뛰어 넘어 평화 체제를 안착시킬 수 있는 ‘신 북한 독트린’이 필요한 시점이다.
분단 3세대 김정은의 통일 거부 선언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지난 14일 미사일 발사 현장에서 “해상 국경선을 믿음직하게 방어”하라고 지시한 뒤 “국경선을 침범하면 무력 도발로 간주할 것”이라는 ‘말 폭탄’을 날렸다. 서해 북방한계선(NLL) 무시 발언은 상투적이지만, ‘국경선’이라는 표현을 최초로, 의도적으로 사용한 대목이 주목된다. 지난달 15일 최고인민회의에서는 “대한민국을 철두철미 제1의 적대국으로, 불변의 주적”으로, 또 “전쟁이 나면 대한민국을 완전히 점령, 평정, 수복하고 공화국 영역에 편입”하는 내용을 헌법에 명기하라고 지시했다.
나아가 김 위원장은 “꼴불견으로 서 있는 조국통일3대헌장 기념탑을 철거하라”고 지시하고 남북 경협의 통로이자 접점인 경의선을 끊으라고 했다. 선대(김일성, 김정일)의 업적이자 유훈을 송두리째 부정한 것이다. 또 지난 연말 노동당 회의에서는 “흡수 통일, 체제 통일을 국책으로 정한 대한민국 것들과는 그 언제 가도 통일이 성사될 수 없다”며 대남 정책의 기조 전환을 거칠게 주문했다. ‘남조선’을 ‘대한민국’으로 바꿔 부른 맥락에서 남북경협 관련 법률과 통일 관련 기구·조직은 폐지, 축소되고 대남 방송도 중단됐다. 실제 개성공단으로 가는 경의선 육로에 지뢰를 매설해 길 자체를 끊었다. 남한과 연을 끊겠다는 의지를 말뿐만 아니라 행동으로까지 보인 셈이다.
남한과 ‘헤어질 결심’을 한 까닭은?
국민의힘 하태경 의원은 15일 국회 토론회에서 “북한이 체제 경쟁에서 완패했음을 인정한 것”으로 규정했다. 적화 통일은커녕 오히려 흡수 통일을 당할 위기 의식에서 빗장을 닫은 것이라는 인식이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언론 인터뷰에서 “내부 결속, 대내용 메시지”라고 단언하고 두 가지 측면을 설명했다. ‘교전 상태의 적대국’ 규정은 최근 한미 연합훈련이나 미국 전략자산의 전개에 따른 불안과 불만에서 비롯된 것이고, 민간 교류로 한류 드라마, 노래가 북한에서 퍼지자 체제 단속이 절실한 상황에서 나온 행보라는 것이다.
반면 지난달 15일 무소속 윤미향 의원실 주최 토론회에서는 지금까지는 ‘특수 관계’인 동족을 향해서는 (핵)무기를 사용할 수 없었는데, ‘대한민국 것들’을 민족이 아닌 교전 상태의 주적으로 정리함으로써 북한 핵 독트린의 논리적 함정을 메웠다는 주장이 나왔다. 북한이 신냉전 정세를 활용해 핵무기 보유국 지위를 얻고 남한을 따돌린 채 비핵화가 아닌 핵 군축을 의제로 미국과 직접 담판을 지으려 한다는 확장 해석이 가능한 대목이다.
서독, ‘통일 불가’ 고집한 동독 끝까지 설득
북한의 ‘민족 부정’은 옛 동독이 ‘2국 체제’를 고집하면서 분단 유지를 고수했던 사례를 연상시킨다. 서독은 동독의 ‘통일 불가’를 수용하지 않고 민족 통일을 법률에 규정한 채 끈질기게 교류를 이어갔다.
한국과 독일 언론의 통일 보도를 비교 연구한 동명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이화행 교수는 “서독에서도 분단 체제를 유지하자는 흐름이 있었으나, 결국 장기간 인내하면서 통일 정책을 고수한 덕분에 결정적 순간이 오자 민족 통일을 달성했고 국력 신장까지 얻었다”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TV 등 서독의 문화와 정보가 동독으로 유입된 영향이 컸다”고 덧붙였다.
현실주의 대 전략적 접근
북한의 ‘통일 불가’ 입장이 전해진 뒤 국내에서는 ‘현실성이 떨어지는 이상주의’일 뿐인 통일을 추구하는 대신 ‘외교 관계로 협력을 도모’하자는 현실주의 흐름도 등장했다. 더 이상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 아니라는 취지로, 2개 국가를 인정하고 공존책을 찾자는 것이다. 즉, 평화 공존형 2국 체제론이다.
반면 ‘민족·통일 부정’을 한국이 용인해서는 안 된다는 전략적 접근론도 지지를 얻는다.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역학 관계로 볼 때 한국이 통일 정책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미일중러 4개국은 영구 분단 체제를 내심 반길 공산이 크다. 미국과 일본은 한미일 삼각 동맹의 강화에 주목할 테고, 중국과 러시아는 미국과의 패권 경쟁 전선에 북한의 완충 역할을 기대할 테다. 특히 중국은 북한에 변고가 생길 경우 ‘이해 관계’를 주장하며 개입할 여지를 노려 한국이 ‘특수 관계’가 아닌 쪽으로 정리되기를 바랄 수도 있다.
앞으로 북한은 미국, 일본과 직접 담판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이 구도가 굳어지면 한국은 한반도 현안에서 패싱당하거나 운신의 폭에 제약을 받을 수 있다. 통일은 고사하고 평화 체제를 구축하는 과정에 주도권을 쥘 수가 없다. 이것이 남한이 남북한의 ‘특수한 관계’, 즉 민족 통일을 지향하는 관계라는 입장을 고수해야 한다는 주장의 근거다.
‘쿨’하게 헤어지고도 평화 공존을 얻을 수 있으면 그 방향을 선택하면 되지만 현재로서는 난망이다. 북한의 ‘교전 중 적대국’ 프레임이 전쟁 위험성을 그대로 안고 있어서다. 한반도 평화 체제 구축에 남북 화해와 민족 통일을 전제하는 것이 동력이 된다면 전략적으로 ‘특수 관계’ 노선을 고수해야 된다. 물론 북한이 ‘통일 불가’를 선언한 상태라 난관은 불가피하다. 현실론이건 전략적 접근이건 어떤 경우라도 ‘전쟁 없는 한반도’가 대원칙이다. 새로운 전략을 짜야 한다. 우리가 주도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지금 영구 분단과 평화 공존의 복합 변수가 얽혀 있는 새로운 갈림길에 서 있다.
김승일 논설위원 dojune@busan.com